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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60년 감독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2022.02.0 1.06:44

1962년 2월 4일 서울 국도 극장. 설을 맞아 새 영화가 상영됐다.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고 한다. 제목은 학생독립단이 서대문형무소를 파괴하고 온갖 시련 끝에 만주로 건너가 항전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사랑, 배신, 오해, 고문을 당해 목숨을 잃는 가족, 필사적인 탈출과 일본군의 산중 추격전 등을 그린 흑백영화다. 마지막 장면은 전설이 되었다. 설원을 배경으로 한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 독립군은 스키를 타고 총을 쏘며 일본군을 압도한다.이전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상상력과 스케일에 관객은 열광했다. 제작자는 최관두, 관객 수는 6만9000명이다. ◆서울 인구는 250만 명이고 관객이 5만 명을 넘으면 제작자가 큰돈을 번다는 시대다. 2022년 기준이라면 '500만 관객'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신인 감독의 이름은 임권택. 그래서 2022년 2월 4일은 거장의 감독 데뷔 60주년 기념일이다.◇부산 국제시장에서 18세의 군 화장사 때 임권택은 집에서 기차표만 훔치고 집을 나갔다. 정전(1953년 7월) 전의 일이다. 돈을 더 가져오면 됐지만 집 안에는 훔치고 싶어도 훔칠 게 없었다.임권택은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 도착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길가에서 자고, 노동판에 지게를 짊어졌다. 힘이 없어서 일이 서툴고, 일이 서툴고 일도 부족했다. 말 그대로 춥고 배고파 술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나날이었다. 막노동이나 음주후과는 손이 떨리는 증세. 이래서는 못 살 것 같아 시작한 게 군화장사다. 장사를 한 것은 국제시장이다.◆전쟁통에도 예술혼은 꽃핀다. 자유를 갈구하는 기질은 포화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법이다. 군화장사로 돈을 번 사람들 중 일부는 서울에 가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1956년에 개봉했다. 이 영화를 만들고 있을 때 인편으로 임권택에게 연락이 왔다. 촬영현장에서 잔심부름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이젠 망설이지 않고 살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군화장수가 거의 망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올라왔어요. 연출부가 아니라 제작부로 들어간 거예요. 촬영하는 걸 봤는데 영화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연출부로 옮긴 것은 4~5년 후입니다. 제작부든 연출부든 전 처음부터 영화판 분위기가 좋았어요.주야로 묵묵히, 그러나 미친 듯이 소임을 다하는 임권택을 당대 일류 정창화 감독이 주목했다. 정창화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연출부에 정식으로 들어갈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임 감독은 그때부터 눈에 띌 정도로 성실했다고 한다. "오전 4시의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만 불면 곧장 사무실로 나와 묵묵히 온갖 허드렛일을 다했다" 전창화 감독이 임권택을 키우겠다고 결심하고 연출부에 발탁한 이유다.영화 공부한 적은 별로 없어요. 제게는 오로지 정창화 감독님의 촬영 현장이 교과서이자 학교였습니다. 영화 일도 정창화 감독님 밑에서만 배웠어요. 정 감독은 고지식하고 성실하고 예술적인 고집쟁이었어요. 정확한 콘티(continuity)를 바탕으로 촬영했습니다. 콘티만 봐도 영화를 본듯한 느낌이었어요.◇감독 데뷔는 어떻게 됐어요.그때는 예비 감독들이 영화적 재능이 있는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어요. 한번 만들어 보라는 게 재능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거든요. 그래서 처음 감독님 제안을 받았을 때 많은 감정이 교차했어요.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작품으로 제 영화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 소원이 평생 열 작품을 했으면 좋겠다고 3주간 흥행했고 위의 스키 장면에서는 관객 전원이 박수를 보냈다. 독립군이 스키를 탈 수 있느냐면서도 좋아했다. 참고로 영화 속에서 스키를 타고 독립군으로 출연한 배우는 모두 원주 제1야전군사령부 스키부대 현역 장병이었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것이다.'걷는 영화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정종화 선생은 이 영화에 대해 "2008년 660만명을 동원한 '한국산 만주 서부극'의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작품만 보고 배우 고른다"

임권택의 주량은 소주 2병 정도지만 거의 매일 약주를 즐긴 애주가다. 예외는 있다. "그건 내 양심에 관한 문제죠. 40-50명의 스태프가 감독 하나만 보고 대기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술 먹고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작업과 관련된 원칙이라면 또 하나가 있다. 캐스팅에 대해서는 누구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채령 부인의 증언이다.감독은 작품만 보고 배우를 고릅니다. 박노식 선생님이 유일하게 감독님과 호형호제였던 배우인데, 아들 박준규 씨가 방송에 출연하셨어요. 아빠 찬스를 써봤느냐는 질문에 없다. 임권택 감독이 나를 한 번도 부리지 않았다는 게 증거라고 말했다.임권택 감독이 이렇게 덧붙였다.캐스팅을 잘못하면 감독도 망하고 배우 본인도 망하고 영화사도 망해요.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은

1993년 이청준이 발표한 소설을 영화화한 는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작품이자 영화 한 편이 영화를 넘어 사회 현상으로 승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국민의 성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조심해야겠다는생각을했어요. 제 영화가 이렇게 많은 관객을 만난다면, 그래서 국민의 정신적 정서적 건강에 어떻게 기여하느냐 하는 문제를 보면, 제가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에 따라 영화가 위험한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제일 아니야"라고 항상 다짐했죠 인기와 명성에 휘둘려 자신을 놓치면 곤란하다고 거듭 말했습니다."소설가 이청준(1939~2008)과는 이웃이었다. 용인의 한 아파트에 우연히 함께 입주해 집을 오가며 영화와 문학을 나눴다. 영혼의 동반자라면 두 명이 더 있다. 제작자 이태원(1938~2021)과 촬영감독 정일성(93)이 주인공이다.두 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한 사람입니다. 두 분이 없었다면 내 영화 인생도 다르게 흘러갔을 겁니다. 영화 인생에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내 인생이 폐만 끼치는 인생이었던 것 같아요. - 가장 중요한 작품이 뭘까요?-------------------------------------------------------------------------------------뛰어다니는 감독님, 준비를 잘하시는 감독님이에요. 그 중에서도 헌팅이 중요합니다." 헌팅을 소홀히 하면 영화는 만들 수 없습니다." 이문열의 단편을 영화화한 (1983)에 등장하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충북 단양, 수채화 같은 풍경은 전남의 섬을 수없이 답사한 흔적이다.

◇ 허장강·김지미 안철수

임권택에게 영화란 무엇입니까.저는 영화를 좋아해 평생 함께 살았을 뿐이에요. 저는 영화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다 재미있었어요.원하는 감정이 솟아날 때까지 배우에게 많은 말을 했어요. 그걸 끌어내지 못하면 영화 일을 그만둬야 해요.제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가 제게 좋은 인연이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한 명을 꼽으라면허장강(19251975)은 독특한 배우였어요. 감정을 극대화시켜 드러내는데 자연스럽진 않지만 분명히 느낌을 얻은 거죠. 딱 그 상황에 맞는 연기를 내 방식대로 한 배우예요. 필자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배우들에 대해 물었다.김지미는 좋은 의미로 열심히 하는 편이고, 안성기는 성실한 사람이에요. 가장 고마운 것은 위험한 촬영이 많았는데도 한 번도 사고가 없었다는 점이다. 1960, 70년대, 80년대는 안전의식이나 장비가 지금과는 달랐던 시대다. 실제로 영화를 찍고 유명세를 달리한 영화인도 많다.촬영 중에 제가 실탄을 쏜 적도 있어요. TNT 폭약을 미리 듣던 중 실수로 폭발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다행히 촬영 중에 한 번도 사고는 없었습니다. 그 점이 언제까지나 감사할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것"

임권택의 필모그래피는 총 102편. 101번째 작품이(2010), 102번째 영화가(2014)다.더 이상은 작품 만들기가 힘들잖아요. 무엇보다 체력과 건강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죠. 제 모든 작품은 습작이죠. 저는 평생 영화를 하면서 살았지만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작품은 만들지 못했어요. 영화감독으로 이 정도면 좋은 영화를 못 찍었을 거예요.인생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영화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며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 서로를 응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내 인생은 내가 좋아서 산 거니까 '그런 인생을 산 선배가 있었구나' 이렇게 기억하시면 되는 겁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